많은 선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그분 위에 내려오신 성령을 독립적이고 분리된 인격적 존재로 믿는다. 또한 삼위일체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침례 장면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함께한 사건으로서, 이 장면이 신격의 세 인격을 분명히 구분하여 보여 주며 곧 삼위일체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성경과 예언의 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살펴보자.

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 14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매. 15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 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똑바로 물 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리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17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3:13-17}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나사렛으로부터 오사 요르단 속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들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시더라. 11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마가복음 1:9-11}
21 이제 온 백성이 침례를 받았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몸의 형태로 그분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본문들을 삼위일체의 증명 구절로 사용하려는 이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점은, 세 ‘구성원’(아버지, 아들, 성령)이 모두 함께 등장하며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고 계시고, 성령은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며, 아버지는 하늘에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시며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부르시는 장면은 예수와 아버지가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인격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비둘기로 상징된 성령 역시 다른 두 분과 구별되어 나타나는 존재로 묘사된다.

신학적 차원에서 볼 때, 이 본문이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경계하게 해 주는 오류는 양태론(Modalism)이라 불리는 이단이다. 양태론은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는 점은 올바르게 인정하지만, 아버지·아들·성령이 하나님의 서로 다른 방식(양태, modes)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잘못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양태론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셨고, 성육신 때에는 “아들”이 되셨으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주장해 왔다. 즉, 양태론에서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실제로는 한 신적 인격이 역사 속의 서로 다른 단계에서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계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단을 비교적 쉽게 반박하는 성경 본문들 가운데에는, 삼위가 함께 등장하지만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장면들이 포함된다. 여기서 다루는 예수의 침례 장면도 그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세 분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곧바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한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는, 이 장면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예언의 신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비둘기처럼 나타난 형상이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별하는 데 유익하다. 엘렌 화잇에 따르면, 비둘기 같은 형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 곧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으며, 이는 예수의 성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전혀 별개의 독립적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진술들을 주목해 보자.

“천사들은 전에 이러한 기도를 들어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이신 예수께 보증과 위로의 기별을 전해 주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의 간구를 응답하실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의 빛줄기가 직접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하늘이 열리고 구주의 머리 위에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에 대한 적절한 표상인 비둘기 같은, 가장 순결한 빛의 모양이 내려온다. 요단강에 모인 큰 무리 가운데 침례 요한을 제외하고 하늘의 이상(異像)을 식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엄숙함이 회중 위에 임하였다. 사람들은 서서 묵묵히 예수를 주목하였다. 그분의 몸은 하나님의 보좌를 항상 두르고 있는 그 빛으로 덮여 있었다. 위를 향한 그분의 얼굴은 그들이 전에 사람의 얼굴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영광으로 빛났다. 열린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 {DA 112}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침례 때 드린 이와 같은 기도를 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할 기별의 전달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아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영광의 빛을 내보내신다. 하늘이 열리고, 영광의 광선이 하나님의 아들 위에 머물렀는데, 그것은 윤이 나는 금과 같은 모습의 비둘기 형태를 취했다. 그 비둘기 같은 형상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라움에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 열린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확증의 말씀은, 이 광경을 목격한 자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의 험난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붙들어 주기 위해 주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입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친히 자신의 음성으로 그분이 영원하신 분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셨다. 이와 같이 아들에게 나타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의 탁월함을 통해 높임 받은 인성을 받아들이신다.” — {2SP 60.2}
“그리스도의 신성은 숨겨진 보화와 같았다. 그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때때로 신성이 인성을 통해 번쩍이며 나타나 그분의 참된 품성이 드러났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아들과 하나 되심을 증언하셨다. 그분의 침례 때 하늘이 열리고, 윤이 나는 금과 같은 비둘기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구주 위에 머물렀으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와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다.” — {YI Aug 22, 1895}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 요단강가에서 인류를 위해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렸고, 윤이 나는 금과 같은 비둘기 모양으로 하나님의 영이 구주의 형체를 둘러쌌으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와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다.” — {Child Guidance 525.3}

위에 인용된 여러 진술들은 모두 성경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의 침례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나, 표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진술들에 따르면, 그리스도 위에 머물렀던 “가장 순결한 빛”, 혹은 “윤이 나는 금과 같은” 비둘기 같은 형상은 다름 아닌 아버지 자신을 나타낸다. 곧, “아버지께서 친히 아들의 간구에 응답하시며, 보좌로부터 직접 영광의 광선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진술들에서 주목할 점은, 이 비둘기 같은 형상이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표상(emblem)”,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을 나타내는 합당한 상징”으로 반복해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둘기 같은 형상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상징하는 표지이지, 또 다른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반면, 이 비둘기의 나타남을 전혀 다른 독립적 인격(곧 ‘성령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성경에도, 예언의 신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은 아버지 또는 아들의 영(Spirit)을 통한 편재성이다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시편 51:11}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혹은 내가 주의 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9 내가 아침의 날개들을 취하여 바다 맨 끝 지역들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 {시편 139:7-10}
“영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이 너희에게 오셔서 너희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4:23 인용]” — {BEcho, January 15, 1893}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인성을 입으신 상태로 계셨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신성의 주요 속성 중 하나인 편재성을 스스로 포기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당신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가질 수 없는 어떤 특성을 나타내거나 어떤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완전한 인성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 {DA 664.4}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영으로 편재하셨다. 예언의 영이 증언하듯, 그리스도 위에 내려오신 것은 아버지의 영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보혜사(Comforter)”, 곧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 자신의 영을 매개로 임하게 된다.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요한복음 14:18}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가 그와 함께 있게 하리라.” — {요한복음 14: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나니..” — {요한복음 17:23}
“성령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필수적인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곧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으며, 보혜사는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영’, 곧 성령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 17). 이 말씀은 보혜사라 불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편재성(omnipresence)을 가리킨다. 다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2, 13).” — {14MR 179.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실 때, 그들이 홀로 남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그들과 가까이 있을 것임을 보증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편재성을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민족에게로 가라’고 하셨다. ‘사람이 거주하는 땅의 가장 먼 곳까지 가라. 그러나 내가 거기 있을 것임을 알라. 믿음과 확신으로 일하라. 내가 너희를 버리는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 {ST August 12, 1903, par. 6}
“인성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격적으로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어 지상에서 자신의 대리자가 되게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유익한 일이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인성의 인격을 벗으신 상태로, 그것과는 독립된 분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성령을 통해 모든 곳에 계신 분, 곧 편재하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 {Lt119, Feb 18, 1895}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증언한다. 연약하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분께서 지상에서 가장 크신 관심을 기울이시는 유일한 대상이다. 그분은 온 세상에 나아와 구원받으라는 초청을 베푸시는 동시에, 회개와 통회로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영혼을 돕도록 천사들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성령을 통해 친히 우리 가운데, 자신의 교회 안으로 오신다.” — {Lt2d-1892.7}

출처: https://asitreads.com/2017-8-29-who-or-what-was-the-dovelike-form-symbolized-during-christs-baptism/